자주 우리 아빠 직업을 말할 때… 예전에는 말 그대로 가장 쉬운 단어이면서 알기 쉬운 노가다라 하였고, 노가다라는 단어가 일본어라고 한 뒤부터는 육체노동이라고 하였다.실제로 노가다팡이라는 곳에서는 대부분의 용어가 일본어로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다.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20년 전만 해도 그랬다.노가다판에서는…
저의 아버지는 자주 표현하면 건축 현장 실무자였다.알몸으로 미용사를 했지만 아버지도 아닌 기술자로서 아버지들이 일을 해오면 그 일을 같은 미지에은이들과 함께 새벽부터 밤까지···일이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끝나고 그런 시절부터 찾아왔다.지금은 노동력이 금값이지만 사람의 수요가 더 많았던 시절에는 “노가”라는 막일은 특별한 규정도 없고 문자 그대로 완강하게 추진했던 것이 대부분이었다.그 중에서 나도 학생 시대에 안감 섬이라는 일을 했지만, 지금의 아르바이트와 말할 수 있는 일이다.일당 받는 일로… 그렇긴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도끼를 다시 하던 시절 처음으로 받은 5천원이 노가다에서 번 최초의 금액이며, 이후는 미용실의 안감으로 인건비는 상상 이상으로 많이 받았다.그렇게 고등 학교 시절에도 친구와 함께 일요일에도 자주 아르바이트에 나섰고…이에 나이 이후 청년 시대에도 시간적 여유가 될 때는 놀지 않고 뭔가 일을 하러 다니던 때가 있었다.지금 생각하면…이래봬도젊어서 고생은 사서 라도 한다는 말처럼 했지만 다시 한번 하라고 하면 하고 하나…라는 생각도 든다.그러나 그 시대에는 내가 처한 환경이 그것이 최선이었다.정보 부족으로 개구리의 우물 속 같은 생활이었다.
가끔 아버지가 군대 시절 배운 이발 병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 아버지의 직업에 대해서 꾸짖기도 했다.내가 어릴 적 기억으로는 아버지는 종종 시골의 복수면에 가서 시골 노인들이 찾아 준 것을 기억한다.돈을 받고 다녔는지..아버지의 고향이라서 자원 봉사 활동을 했는지 기억 나지 않지만 그 기술을 활용하여 이발소에서도 버티었다면 우리의 가세는 거기까지 힘들지는 않았을 텐데…이래봬도았다는 아쉬움에서 나온 나의 질타이다.의외로 이발소가 꽤 되는 것을 주위에서 보고 들었다.그 좋은 기술을 버리고…이래봬도노가다팡에서 그 힘든 미용실에 가면 나까지 권했기 때문···아빠지만… 그렇긴정말 생각이 짧은 발상이었다.지금 만약 제가 미장공을 했더라면… 그렇긴어쩌면 돈을 더 벌었지만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건설…아니…··건축 분야에서 미용사의 입장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벽돌로 쌓아올린 다음 마무리를 미용실에 하던 시절에는 미용실이 필수였는데 지금은 어디인가?···건축 양식이 바뀌어 미용실의 분야는 정말 이전에 비하면 백분의 일로 줄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아버지는 85세다.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아니야 여기 사진관 리모델링 공사할 때가 아마 마지막 미용실이 아니었나 싶다.사진의 도구는 어떤 미련인지 아직도 보관하고 있고, 그것을 치우려는 어머니와 자주 말다툼을 벌인다.어머니가 그 힘들게 들고 다니던 도끼육수기계는 벌써 수십 년 전에 모두 고물상에게 팔아버렸다. 애증이 담긴 물건으로… 그 속에는 기쁨보다 슬픔이 행복보다 고통의 기억이 많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그 중에는 나도 어느 정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시간이 지나면 고생도 추억이라고 하지만 어디서 그런 고생을 해봐야 그런 말이 나오는지···실제로는 ‘고생은 고생이고 더 심하게 고생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추억으로 떠올리기조차 싫은 기억은 분명히 있다.
미장 건축 공사로 벽이나 천장, 바닥 등에 흙이나 회, 시멘트 등을 바른다. 또는 그런 거.
도기다시 togidashi 형태 [{일본어}]togidashi연출] 명사 1. 돌 등을 닦아 윤기를 내는 것을 속칭으로 일컫는 말.따오기의 비표준어고려대학교 한국어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