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5. 3.
<특별인터뷰> 국민가수 화춘화
‘제 노래를 애창해 주셔서
저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2월 8일 오전 기자는 구로구 가리봉동 지구촌사랑나눔센터에서 국민가수 하충화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지난 1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하춘화가요 인생 50주년 리사이틀 공연> 수익금 전액을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을 위한 지구촌국제학교 개교기금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기자가 처음 접한 그는 너무나 싹싹하고 인정이 넘치는 평범한 여자였다. 이날 성금을 낸 뒤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이 그녀를 위한 감사의 뜻으로 무대에서 합창하자 그는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훔쳤다. 아마도 그들의 자녀들이 하춘화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때 너무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이라고 기자는 예감했다.
50년 동안 자신의 베스트 3곡을 <물새 한 마리>, <영암아리랑>, <나를 버린 남자>로 정한 그녀 하춘화. 그는 연예인들이 더 찾고 원하는 성형의 모습이 아니라 자연산 엄마의 얼굴을 소중하게 여기며 날개옷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올해로 9순위가 된 어머니가 준 선물이어서 매일 운동을 하며 자신의 몸을 잘 가꾸고 있다는 그녀, 하춘화, 기부금 전달식이 끝난 뒤 기자는 국민가수 하춘화의 가요인생을 알아보기 위해 그녀와의 인터뷰 데이트에 돌입했다.
지난 1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가요인생 50주년 공연이 아주 성공했다는 소문이 많았는데 소감이 어떠세요?처음에 공연을 기획하면서 연출자와 약속한 적이 있어요. 공연은 막을 내리더라도 오래도록 훌륭한 자료로 남길 수 있는 그런 공연을 만들자는 것이었어요. 지난 공연의 핵심은 <하춘화가 50년을 통해 본 한국가요 80년사> 였습니다. 한국 가요사를 80년으로 만드는 데 그중 50년을 쉬지 않고 현역으로 뛰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한국가요 현장에 항상 제가 있었으니까요.지난 공연에서는 제 히트곡과 함께 제가 활동했던 50년간 국민과 애환을 함께하며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됐던 노래, 그리고 제가 활동하기 전 일본식민지시대의 노래와 최근 여러분께 사랑받고 있는 히트곡을 선보였습니다. 하춘화 노래는 물론 한국가요 80년 노래를 되새길 수 있는 한 분야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던 그런 기회였던 것 같아요.
항상 MBC와 함께 공연을 하셨는데 어떤 인연이 있으신가요?인연이 있죠 MBC는 제 노래랑 동갑이에요 즉 MBC 개국 나이와 저의 가요계 데뷔가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30주년, 40주년, 45주년을 같이 해서 지난 50주년을 함께 했는데요. 또 다른 인연은 제가 중3때 처음 TV에 출연했던 곳이 MBC였습니다. 그 당시 <쇼방세기> 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출연을 권유받아서 급하게 나가서 정신없이 노래를 불렀습니다.’쇼반세기’라는 프로그램은 옛날 가요를 부르면서 유행했던 시절 이야기를 악극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프로그램인데 어려보이면 문제가 될까봐 일부러 나이 들어 보이고자 한복을 입고 노숙한 분장을 하고 나와서 처음 부른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출연 한번으로 최근 말로 대박이 나서 <쇼반세기>가 마치 여름 춘화 프로그램처럼 매주 출연하게 되었습니다.그 당시 담당 PD가 차재영 선생님이었는데 <쇼 반세기> 이후로 다른 프로그램을 맡았는데도 항상 저를 캐스팅해주시고 거의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무시하면서 저를 대중가수로 성장시켜 주었어요. 몇 년 전 MBC 모 프로그램에서 갑작스럽게 만남을 주선해 뵌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도 많은 가수를 발굴하며 성장시켰는데 가장 빠르게 성장한 가수가 ‘하충화’라고 회고될 정도로 하충화가 ‘대중가수’ 선두그룹에 서기까지는 MBC의 협조가 절대적이었어요.
지난 50주년 공연은 ‘국민가수 하충화’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대중가요는 TV를 틀면 나오고 라디오를 틀면 나오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모르는 것 같아요. 만약 오늘 하루를 대중가요 자체를 없애는 날로 삼으려면 아마 무법천지가 될 겁니다. 그만큼 사람의 감성이 메말라 버려서 표현할 방법을 잃게 되니까요. 이렇게 한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 온 것이 대중가요입니다.하지만 너무 가볍게 소비되는 게 아쉬울 때가 많아요. 그래서 저는 지난 공연을 통해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와 의미를 제대로 알렸다고 자부합니다. 저는 가수이기 때문에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인 ‘노래’로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도 계속 보려고 합니다.
후배 가수들에게 50주년이라는 단어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요즘 노래 잘하는 후배들이 정말 많아요. 그리고 한창 상큼한 아이돌 가수를 보면 외모도 이쁘고 춤도 잘추고 그것도 제 눈에는 이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을 만나면 항상 친구처럼 대해 주면서 ‘너희들은 얼굴도 예쁘고 우리가 활동할 때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하고 있으니까 항상 열심히 하고 노래 연습도 많이 해라.’ 라고 잔소리 말고 잔소리도 해주고 있습니다.그들에게 50년째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선배가 건재하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강하게 느꼈으면 좋겠어요.
흔히 음악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행복을 준다고 합니다. 음악이 화춘화에게는 어떤 행복을 주었을까요?늘 하는 생각이지만 길을 가다가 하춘화 씨 팬이에요. 사인을 해 주세요라는 말보다는 저희를 즐겁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정말 행복하고 제가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외국의 원수나 사절이 오면 한국을 대표해서 공연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6살때부터 소위 유명세를 타고 국가의 큰 행사에는 참가를 했습니다. 그럴때 나라를 위해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행복합니다.가장 기뻤던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면, 10여 년 전에 지금은 고인이 된 오부치 일본 총리가 내한했습니다. 당시 한일감정 등 여러 가지 복잡한 현안이 많아 내한했는데, 방한 일정 중에 1시간 동안 여름 봄꽃 공연 관람이 있었어요. 같이 노래도 부르고 너무 분위기가 좋았어요. 그런데 며칠 후 신문에 ‘하춘화 가요외교’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났죠. 깜짝 놀랐잖아요!。공연 다음날 중요한 회담이 있었는데 전날 공연을 본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아주 좋아져서 회의가 순조롭게 끝났다고 합니다. 오부치 총리를 제 공연에 초청한 분은 김종필 당시 총리였는데 그 후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총리 공관에 식사 초대를 받았어요. 그때 ‘내가 노래를 부르면서 저렇게 큰 역할을 했구나’라는 가수로서 큰 보람을 느끼고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음악이 나에게 행복을 준다기보다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행복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수로 살아온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요?어린 시절 또래들과 놀지도 못하고 청소년기를 친구들과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가 없느냐고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 내 대답은 전혀!입니다. 차라리 노래를 못했다면 너무 아쉽고 후회했을 거예요. 좀 아쉬우면 교과서적으로 살아온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제 에세이집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한번도 제가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말하고 살아본 적이 없어요. 짜여진 스케줄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 부분은 좀 아쉬워요. 하지만 후회는 전혀 없어요.
한국 대중가요사의 중심부를 관통해 온 국민가수로서 한국 대중가요를 정의한다면?어느 나라나 대중가요에는 그들만의 색깔이 있지만 한국은 좀 특별해요. 힘든 일을 많이 겪었어요 일제강점기, 625전쟁, 전후엔 너무 가난했고. 그래서 예전에는 슬픈 노래들이 많았어요 슬픈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그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위로를 받았죠 한국의 대중가요는 국민과 함께 호흡해온 ‘파트너’입니다. 나라 잃은 슬픔을 노래를 들으며 극복하고 달래고 그 무서운 전쟁 속에서도 공포를 이기게 해주었기 때문이죠.
노래하지 않았다면 하춘화의 인생에서 50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이런질문을받을때마다생각하는것인데,어떤팔자세가있을지어릴때부터항상나는노래를떠나서는안된다라는생각이있었습니다. 물론 어떤 일을 해도 열심히 살아왔겠지만 50년을 기념할 만한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요? 뭐..굳이 생각해보자면 현재 대학교에서 우리 대중가요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참 재미있고 사명감을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가수를 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면 열심히 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데 그렇죠? 50주년을 기념하는 원로학자나 교수가 될 수 있을까요? 제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연예계도 어려웠지만 여성이 꾸준히 공부한다는 것도 만만치 않은 시대여서 아마 50주년을 기념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하춘화에게 행복이란 무엇입니까?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것, 그리고 오늘의 화춘화가 존재하는 것은 항상 후원하고 지켜봐 주신 팬들 덕분입니다. 오히려 지난 무대는 ’50주년이었어요’라고 자랑하는 무대가 아니라 ’50년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감사와 보답의 무대였습니다. 앞으로 목소리가 나오는 그날까지 노래를 부르겠지만 그 노래를 오늘만 부르고 내일 그만두더라도 오늘까지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싶습니다. 제 노래를 들어주시는 여러분이 있어서 저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지난 번 공연에서는 어려운 이웃 돕기라는 말을 처음 썼다고 들었어요. 그 이유는? 맞아요. 1974년으로 기억하는데 안양에 있는 나자로마을서로돕기공연을 기획했습니다 나자로 마을은 나환자촌입니다. 나환자촌에는 나환자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습니다. 한센병은 자녀에게 계승되는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한센병 환자들의 자녀를 ‘미감아’라고 부릅니다.
2월 8일 오전 기자는 구로구 가리봉동 지구촌사랑나눔센터에서 국민가수 하충화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지난 1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하춘화가요 인생 50주년 리사이틀 공연> 수익금 전액을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을 위한 지구촌국제학교 개교기금으로 전달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기자가 처음 접한 그는 너무나 싹싹하고 인정이 넘치는 평범한 여자였다. 이날 성금을 낸 뒤 다문화가정 어린이들이 그녀를 위한 감사의 뜻으로 무대에서 합창하자 그는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훔쳤다. 아마도 그들의 자녀들이 하춘화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불러줄 때 너무 가슴이 찡하고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이라고 기자는 예감했다.
50년 동안 자신의 베스트 3곡을 <물새 한 마리>, <영암아리랑>, <나를 버린 남자>로 정한 그녀 하춘화. 그는 연예인들이 더 찾고 원하는 성형의 모습이 아니라 자연산 엄마의 얼굴을 소중하게 여기며 날개옷으로 열심히 살고 있다. 올해로 9순위가 된 어머니가 준 선물이어서 매일 운동을 하며 자신의 몸을 잘 가꾸고 있다는 그녀, 하춘화, 기부금 전달식이 끝난 뒤 기자는 국민가수 하춘화의 가요인생을 알아보기 위해 그녀와의 인터뷰 데이트에 돌입했다.
지난 1월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가요인생 50주년 공연이 아주 성공했다는 소문이 많았는데 소감이 어떠세요?처음에 공연을 기획하면서 연출자와 약속한 적이 있어요. 공연은 막을 내리더라도 오래도록 훌륭한 자료로 남길 수 있는 그런 공연을 만들자는 것이었어요. 지난 공연의 핵심은 <하춘화가 50년을 통해 본 한국가요 80년사> 였습니다. 한국 가요사를 80년으로 만드는 데 그중 50년을 쉬지 않고 현역으로 뛰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죠. 한국가요 현장에 항상 제가 있었으니까요.지난 공연에서는 제 히트곡과 함께 제가 활동했던 50년간 국민과 애환을 함께하며 사회적으로 큰 화제가 됐던 노래, 그리고 제가 활동하기 전 일본식민지시대의 노래와 최근 여러분께 사랑받고 있는 히트곡을 선보였습니다. 하춘화 노래는 물론 한국가요 80년 노래를 되새길 수 있는 한 분야를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었던 그런 기회였던 것 같아요.
항상 MBC와 함께 공연을 하셨는데 어떤 인연이 있으신가요?인연이 있죠 MBC는 제 노래랑 동갑이에요 즉 MBC 개국 나이와 저의 가요계 데뷔가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30주년, 40주년, 45주년을 같이 해서 지난 50주년을 함께 했는데요. 또 다른 인연은 제가 중3때 처음 TV에 출연했던 곳이 MBC였습니다. 그 당시 <쇼방세기> 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출연을 권유받아서 급하게 나가서 정신없이 노래를 불렀습니다.’쇼반세기’라는 프로그램은 옛날 가요를 부르면서 유행했던 시절 이야기를 악극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프로그램인데 어려보이면 문제가 될까봐 일부러 나이 들어 보이고자 한복을 입고 노숙한 분장을 하고 나와서 처음 부른 노래가 ‘목포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출연 한번으로 최근 말로 대박이 나서 <쇼반세기>가 마치 여름 춘화 프로그램처럼 매주 출연하게 되었습니다.그 당시 담당 PD가 차재영 선생님이었는데 <쇼 반세기> 이후로 다른 프로그램을 맡았는데도 항상 저를 캐스팅해주시고 거의 저를 데리고 다녔습니다.무시하면서 저를 대중가수로 성장시켜 주었어요. 몇 년 전 MBC 모 프로그램에서 갑작스럽게 만남을 주선해 뵌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도 많은 가수를 발굴하며 성장시켰는데 가장 빠르게 성장한 가수가 ‘하충화’라고 회고될 정도로 하충화가 ‘대중가수’ 선두그룹에 서기까지는 MBC의 협조가 절대적이었어요.
지난 50주년 공연은 ‘국민가수 하충화’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대중가요는 TV를 틀면 나오고 라디오를 틀면 나오기 때문에 그 소중함을 모르는 것 같아요. 만약 오늘 하루를 대중가요 자체를 없애는 날로 삼으려면 아마 무법천지가 될 겁니다. 그만큼 사람의 감성이 메말라 버려서 표현할 방법을 잃게 되니까요. 이렇게 한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 온 것이 대중가요입니다.하지만 너무 가볍게 소비되는 게 아쉬울 때가 많아요. 그래서 저는 지난 공연을 통해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와 의미를 제대로 알렸다고 자부합니다. 저는 가수이기 때문에 제가 가장 잘하는 ‘일’인 ‘노래’로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도 계속 보려고 합니다.
후배 가수들에게 50주년이라는 단어 자체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요즘 노래 잘하는 후배들이 정말 많아요. 그리고 한창 상큼한 아이돌 가수를 보면 외모도 이쁘고 춤도 잘추고 그것도 제 눈에는 이쁘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래서 후배들을 만나면 항상 친구처럼 대해 주면서 ‘너희들은 얼굴도 예쁘고 우리가 활동할 때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하고 있으니까 항상 열심히 하고 노래 연습도 많이 해라.’ 라고 잔소리 말고 잔소리도 해주고 있습니다.그들에게 50년째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선배가 건재하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이 강하게 느꼈으면 좋겠어요.
흔히 음악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행복을 준다고 합니다. 음악이 화춘화에게는 어떤 행복을 주었을까요?늘 하는 생각이지만 길을 가다가 하춘화 씨 팬이에요. 사인을 해 주세요라는 말보다는 저희를 즐겁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정말 행복하고 제가 부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외국의 원수나 사절이 오면 한국을 대표해서 공연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6살때부터 소위 유명세를 타고 국가의 큰 행사에는 참가를 했습니다. 그럴때 나라를 위해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행복합니다.가장 기뻤던 일화를 하나 소개하자면, 10여 년 전에 지금은 고인이 된 오부치 일본 총리가 내한했습니다. 당시 한일감정 등 여러 가지 복잡한 현안이 많아 내한했는데, 방한 일정 중에 1시간 동안 여름 봄꽃 공연 관람이 있었어요. 같이 노래도 부르고 너무 분위기가 좋았어요. 그런데 며칠 후 신문에 ‘하춘화 가요외교’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났죠. 깜짝 놀랐잖아요!。공연 다음날 중요한 회담이 있었는데 전날 공연을 본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아주 좋아져서 회의가 순조롭게 끝났다고 합니다. 오부치 총리를 제 공연에 초청한 분은 김종필 당시 총리였는데 그 후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총리 공관에 식사 초대를 받았어요. 그때 ‘내가 노래를 부르면서 저렇게 큰 역할을 했구나’라는 가수로서 큰 보람을 느끼고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음악이 나에게 행복을 준다기보다 음악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행복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가수로 살아온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요?어린 시절 또래들과 놀지도 못하고 청소년기를 친구들과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가 없느냐고 묻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 내 대답은 전혀!입니다. 차라리 노래를 못했다면 너무 아쉽고 후회했을 거예요. 좀 아쉬우면 교과서적으로 살아온 것 같을 때가 있어요. 제 에세이집에서도 말씀드렸듯이 한번도 제가 하고 싶다고 마음대로 말하고 살아본 적이 없어요. 짜여진 스케줄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 부분은 좀 아쉬워요. 하지만 후회는 전혀 없어요.
한국 대중가요사의 중심부를 관통해 온 국민가수로서 한국 대중가요를 정의한다면?어느 나라나 대중가요에는 그들만의 색깔이 있지만 한국은 좀 특별해요. 힘든 일을 많이 겪었어요 일제강점기, 625전쟁, 전후엔 너무 가난했고. 그래서 예전에는 슬픈 노래들이 많았어요 슬픈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그 속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면서 위로를 받았죠 한국의 대중가요는 국민과 함께 호흡해온 ‘파트너’입니다. 나라 잃은 슬픔을 노래를 들으며 극복하고 달래고 그 무서운 전쟁 속에서도 공포를 이기게 해주었기 때문이죠.
노래하지 않았다면 하춘화의 인생에서 50주년을 기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이런질문을받을때마다생각하는것인데,어떤팔자세가있을지어릴때부터항상나는노래를떠나서는안된다라는생각이있었습니다. 물론 어떤 일을 해도 열심히 살아왔겠지만 50년을 기념할 만한 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요? 뭐..굳이 생각해보자면 현재 대학교에서 우리 대중가요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참 재미있고 사명감을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언젠가는 ‘가수를 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면 열심히 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데 그렇죠? 50주년을 기념하는 원로학자나 교수가 될 수 있을까요? 제가 활동하던 시절에는 연예계도 어려웠지만 여성이 꾸준히 공부한다는 것도 만만치 않은 시대여서 아마 50주년을 기념할 수는 없었을 거예요.
하춘화에게 행복이란 무엇입니까?대중 앞에서 노래하는 것, 그리고 오늘의 화춘화가 존재하는 것은 항상 후원하고 지켜봐 주신 팬들 덕분입니다. 오히려 지난 무대는 ’50주년이었어요’라고 자랑하는 무대가 아니라 ’50년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감사와 보답의 무대였습니다. 앞으로 목소리가 나오는 그날까지 노래를 부르겠지만 그 노래를 오늘만 부르고 내일 그만두더라도 오늘까지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싶습니다. 제 노래를 들어주시는 여러분이 있어서 저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지난 번 공연에서는 어려운 이웃 돕기라는 말을 처음 썼다고 들었어요. 그 이유는? 맞아요. 1974년으로 기억하는데 안양에 있는 나자로마을서로돕기공연을 기획했습니다 나자로 마을은 나환자촌입니다. 나환자촌에는 나환자의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습니다. 한센병은 자녀에게 계승되는 질병이 아니기 때문에 한센병 환자들의 자녀를 ‘미감아’라고 부릅니다.





